전주이씨 덕천군파방

 



[변성군자손 급제일람표]

○대과(문과) : 증손 중길
○소과(생진과) : 현손 동석, 구대손 상우 상림, 십대손 식원
○무과 : 팔십칠인
자 : 기수, 이수, 학수, 난수
손 : 유검, 유직, 유찬, 유성, 유적
증손 : 원길, 형길, 승길, 순길, 시길, 윤길
현손 :동영, 태악, 화악
오대손 : 두천, 두산, 두환, 두엽, 두진
육대손 : 중신, 일신, 우신, 영신, 제신, 광신, 세영, 세무, 세신, 잠
칠대손 : 경숙, 경욱, 경철, 경설, 경필, 경노
팔대손 : 흥원, 만원, 창원, 태원, 휘원, 항원, 제원, 복원, 운진
구대손 : 상오, 상준, 상채, 상일, 상구, 영상
십대손 : 태영, 신영, 의영, 호영, 인영, 세영, 직원
십일대손 : 상익, 상윤, 상풍, 상기, 상규, 상욱, 상훈, 상흡, 상협, 악술, 악소, 악응, 악정, 악철
십이대손 : 건두, 건상, 건학, 건석, 건필, 건호, 건승, 건항, 건태, 건춘, 건구
십삼대손 : 민하


[변성군자손 현달일람표]

○원종공신 : 유직
○순직 : 유검, 원길, 시길
○청백 : 유직
○고행 : 중길
아장 : 상일, 신영
통제사 : 경철
병사 : 이수, 유직, 유성, 화악, 중신, 경설, 신영
수사 : 두천
방어사 : 경숙, 만원, 휘원, 상일
승지 : 화악, 중신
도정 : 영신
목사 : 란수, 중신
부사 : 시길, 복길, 우신, 경노, 현노, 태원, 상채, 인영, 상욱, 상협, 악소, 건승, 건석
군수 : 기수, 두엽, 일신, 복원, 제원, 상오, 상준, 건태
현감 : 학수, 동빈
찰방 : 주원
수직 : 두상, 만원, 면재, 면만, 인영, 덕희, 운봉, 건배


[증 정의대부 변성군]
[신도비명병서]

전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문학박사 -이성무 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법학박사 -박병호 전-

서산에는 변성군의 자손이 많이 산다. 변성군 가문은 11대손까지 문과가 1인, 무과가 87인, 생원진사시가 4인의 과거 합격자를 냈고, 1통제사, 8병마수군절도사, 4방어사, 2목사, 13부사, 10군수를 배출했다. 훌륭한 무반가문이었음에 틀림없다.
변선군의 휘는 계연이요 본관은 완산이다. 아버지는 완성군 귀정이요 어머니는 판관을 지낸 백천조씨 석견의 딸이다. 완성군은 계성(화령부수), 계보(상산군), 계연(변성군), 계수(함풍군), 계석(개성부수), 계종(부영령), 계손(여산부령), 계안(파성부령), 계부(서천부령) 등 9남과 8녀를 두었는데 변성군은 셋째 아들이다.
변성군은 1475년(성종6)에 낳아서 1545년(인종1) 7월 28일에 71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처음에는 변성부수를 받았는데 돌아가신 뒤에 종2품 정의대부 변성군에 증직되었다. 부인 현부인 서산송씨는 송효명의 손녀딸이요, 송유징의 딸이다. 처가의 연줄로 서산에 입향했다. 묘는 쌍폄으로 서산이 수석동 소탐산에 계좌로 있다.
아버지인 왕성군은 성종 조에 익운원종공신에 봉해지고 아울러 종 2품 정의대부 완성군에 피봉되었다. 1454년(단종2)에 태어나 1527년(중종22) 3월 21일에 돌아가셨다. 묘는 쌍폄으로, 서울특별시 흑성동 산 54-9번지에 손좌로 있는데 2001년 5월 10일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 17호로 지정되었다. 승문원 참교 심사순이 쓴 묘갈명과 8세손 참봉 광윤이 쓴 묘지명이 남아있다. 활 솜씨가 뛰어나 성종의 권애를 받았고, 어궁을 하사 받기도 했다. 학문은 높지 않았으나 천자가 자수해 다른 사람이 잘 하는 것을 보면 칭찬해 마지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들으면 남에게 전하지 않았다. 집에 있을때는 화초를 길러 마음을 우아하게 갖고, 쓸데없는 오락을 즐기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휘는 효백으로, 1416년(태종16)에 태어나 처음에 종 3품 부정을 받아 아우인 운수군(양호공) 효성과 함께 종친부를 만들어 그 유사당상이 되었다. 여러번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공으로 황제가 차고 있던 누런 영자를 하사받아 차고 다녔다고 한다. 활을 잘 쏘아 세조의 칭찬을 받았고, 1465년(세조11)에는 세조의 밀지를 받아 함길도에 다녀와 다음 해에 신종윤이 되었으며, 1467(세조13) 이시애란이 일어나 세조가 친정할 때 효백을 선봉장으로 삼았다. 그 해 겨울에 겸사복장이 되었고, 곧 신종군에 봉해졌다. 1468년(세조14)봄에 무과 을과 제사인으로 급제해 종 2품 중의대부로 승진되었다. 1469년(예종1) 여름에 예종이 종친들을 모아 활쏘기를 했는데 신종군 효백과 그의 동모제 송림정 효창만 다섯 발을 다 맞추어 정 2품 승헌대부로 승진했다. 1487년(성종18) 3월에 병이나 그 달 13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55세였다. 시호는 공간공이다. 묘는 할머니 예안현부인 강릉최씨(동지중추부사 최경례의 딸)와 함께 쌍분장으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산 16의 6번지에 건좌로 있다. 9세손 광사가 쓴 표석과 묘지가 있다. 이 묘자리는 신종군 자신이 사냥하러 갔다가 잡은 것인데 큰 구슬을 잊었다가 장사 지낼때 광심에서 다시 찾았다고 한다. 이 묘터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었는데 5세손 경석(문충공)이 다시 사들여 자기의 묘도 이곳에 썼다.
증조할아버지는 파조인 덕천군 후생이다. 덕천군은 정종의 제 10남으로서 1397년(태조6)에 태어나 1465년(세조11) 11월 10일에 돌아가셨다. 어머니인 성빈 충주지씨가 꿈에 흰 기린을 보고 덕천군을 낳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효우근친하고 인후과인해 정종이 사랑하시고, 태종이 “원천불갈”의 뜻을 따서 특별히 ‘덕천군’ 세자를 써서 주었다고 한다. 일찍이 왕을 모시고 연회를 할 때 음식에 벌레가 들어갔다 해 왕이 음식을 맡은 자를 참형에 처하려 하자 덕천군이 간해 살려주었다. 이에 태종이 “어질다! 우리 조카여. 네가 아니었으면 잘못 인명을 살상할 뻔했다.”고 재삼 칭찬했다고 한다. 호부의 관리가 관은 2,000냥을 축내고 죽게 되었는데 그 재주를 알아보고 은을 갚아주었더니 과연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한다. 만년에 공주에 농장을 설치하고 금강을 지나가는데 큰 비가 와서 수백호가 떠내려가자 사람을 고용해 뗏목을 만들어 수천인을 살리니 세상이 덕을 쌓았다고 칭송했다.
시호를 ‘적덕’이라 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1456년(세조2)에 원종공신에 녹훈되었고, 시호는 적덕공이다. 1873년(고종10)에 광록대부 영종정경에 증직되었다. 묘는 남한산성 서문 밖 중대면(거여리) 태장동에 계좌로 있었는데 6.25사변으로 이곳이 군용지로 편입되어 1974년 8월 9일에 공주시 의당면 태산리로 옮겼다. 10세손 정자 광찬이 찬한 표석, 묘지와 광사가 찬한 신도비명이 있다. 우찬성 문경공 김안국이 찬한 송림군비에 “덕천군이 왕자 중에서 가장 어질고, 학문을 좋아했다”고 했다. 1739년(영조15)에 연기군 방축동에 부조묘를 세웠는데 뒤에 이를 공주 의랑 태산리로 옮기고 10세 광태가 이건기를 대제학 진망이 중건문을 썼다. 증조할머니 현부인 장수이씨는 장천부원군 이종무의 딸로 묘는 남편과 합편으로 되어 있다.
변성군은 기수, 이수, 학수, 붕수, 란수 등 5형제와 세딸을 두었다. 첫째 아들인 기수는 첨지로 가산군수를 지냈다. 둘째 아들인 이수는 무과에 급제해 벼슬이 경상도 병마절도사에 이르렀으며, 본심이 인후해 일가 친척들을 지성으로 접대했다. 단양우씨 경손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아들은 없고, 딸 하나만 있었는데 사위는 문과를 급제하고, 예조판서를 지낸 권극지이고, 손서는 판서를 지낸 문장가인 월사 이정구이다. 셋째 아들인 학수는 호는 호재로 1519년(중종14)에 태어나 1584년(선조17) 5월 8일에 죽었다. 1546년(명조1)에 무과에 급제해 비인현감을 지냈으며, 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넷째 아들붕수는 정7품 적순부위를 역임하고 수직으로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다섯째 아들인 란수는 무과에 급제해 길주목사를 지냈다.
손자 유직은 학수의 아들과 1583년(선조16)에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이 되었고, 임진란 때 호성공신에 녹훈되었으며, 북병사를 역임했다. 북도에서 10년간 벼슬하면서도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붕수의 아들 유성도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 북병사가 되었다. 란수의 아들 유찬(생부 학수)과 유적도 무과에 급제해 유찬은 선전관, 유적은 주부를 지냈다.
증손 원길은 유직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해 초계군수를 지냈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전사해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원길의 아우 형길과 시길도 무과에 급제해 형길은 도사, 시길은 선전관, 부사가 되었다. 시길은 정묘호란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시길의 아우 복길은 음직으로 부사에 이르렀는데 자질이 단아하고, 언어가 주상했다. 유성의 아들 승길과 윤길은 다같이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정을 지냈다. 윤길의 아우 중길(1814~1855)은 문과에 급제해 좌승지를 지냈다.
현손 동빈은 원길의 아들로 현감을, 형길의 아들 동영은 무과에 급제해 부장을 지냈으며, 복길의 아들 동상은 장신에 수염이 아름다웠고,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5대손 두천은 무과에 급제해 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지냈고, 그의 아우 두병과 두산도 각각 무과에 급제해 첨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태악의 아들 두환과 화악의 아들 두엽도 각각 무과에 급제해 두엽은 군수를 지냈다.
6대손 중신은 두만의 아들(생부 두천)로 병마 절도사를 지냈고, 두천의 아들 일신은 군수, 우신은 부사, 영신은 도정, 제신은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7대손 경옥은 중신의 아들로 부사, 경숙은 중신의 아들로, 방어사, 일신의 아들 경철은 훈련원도정, 오위도총부 부총관, 삼도통제사겸경상우도수 군절도사를 역임했다.
8대손 흥원은 경옥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해 군수, 만원은 경숙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을 지냈다. 경철의 아들 태원도 무과에 급제해 덕원도호부사, 안변진관 병마첨절제사를 역임했다.
9대손 상일은 항원의 아들(생부 태원)로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을 지냈고, 만원의 아들 상여는 효행이 탁이해 정여를 받았으며 김성근이 찬한 행장이 있다.
10대손 신영(생부 상우)은 상채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해 충청도병마절도사겸오위도총부도총관을 지냈다.
11대손 상욱은 신영의 아들로 행평신진수군첨절제사, 함종부사를 지냈다.
이와같이 변성군 가문은 서산지방에서 10여대에 걸쳐 무관을 가장 많이 배출한 명문이었다. 이에 유림들이 누차 변성군의 신도비를 세우자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다가 공이 돌아가신지 460여년이 지났는데도 그 행적을 알 수 없는 것을 민망히 여겨 후손들이 이비를 세우기로 했다. 아무쪼록 이 신도비가 후인들의 충효목인을 다지는 빌미가 되었으면 한다.
서산의 변성군 자손도 번성하다.
무반의 명가, 국가의 동량이라.

서기 2007년 시월 오일
전주이씨 덕천군파 변성군종회 입석


전주 李씨 덕천군(德泉君) [1397(태조 6)∼1465(세조 11)]

덕천군의 휘는 후생(厚生)이고 시호는 적덕(積德)이다.
정종대왕의 10남이며 모후는 성빈 충주지씨이다.
일찍이 성빈이 흰 기린 꿈을 꾸고 공을 낳았으며, 선천적으로 효도롭고 우애로웠으며 인후함이 과인하여 진귀한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형제들과 나누곤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특별히 사랑하여 후(厚)자로 이름을 지었다.
7세에 정성(定省)의 예절을 다하였고, 천성이 문묵을 좋아하였으며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에 수(守)를 배수(拜受)하였는데 종친들의 사회(射會)에 나아가 1등을 하였고 종학(宗學)에 가서도 성적이 가장 우수하였다.
따라서 후에 봉군(封君)할 때 태종대왕은 “아무개는 인덕이 출천(出天)하고 모후가 지씨이니 연못에는 맑은 샘물이 있고 샘물에는 물이 마르지 않아 그 물이 곧 복의 물이다.
그러니 `덕천'으로 군호(君號)를 지으라”하고 `덕천군'이라고 석자를 써 주었다.
태종대왕 때 공이 총관으로 임금을 모시고 조회에 참석하였다가 퇴근하려 할 때였다.
임금이 명하기를 모빈(某嬪)의 아들 첫돌이라 간단한 잔치를 베풀려고 하니 음식을 들고 가라”하므로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금이 공을 곁에 앉게 하고 수저를 들었는데 갑자기 상을 물리치면서 “음식에 벌레가 있다.”라고 호령을 하며 진노하였다.
그리하여 “음식 만든 자를 처벌하라.”고 하니 궁녀 30명과 음식을 올린 사람 40명이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누구도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데 공이 홀로 계단으로 내려가 엎드려 울며 말하기를, “신 이 자세히 보니 그 벌레는 곡식의 벌레로서 독물이 아니오니 인명에는 해롭지 않습니다.
그들을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렇게 공이 간청하였으므로 임금은 그 말을 받아들여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었다.
공은 항상 검약하고 사치를 멀리하여서 봉록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도와주곤 하였다.
공이 일찍이 누이 덕천옹주(德川翁主) 댁에서 누이의 병을 간호할 때에 10여 명의 도둑이 담을 넘어 들어와 곳간을 뒤지다가 창고지기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공은 그때 도적들을 불러 상세한 연유를 물어보고 필요한 만큼 돈을 꾸어주었다.
공은 비록 귀한 왕자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농사에도 힘을 써서 공주에 전장(田莊)을 두고 때때로 내려가 몸소 노동 일을 하였다.
어느 해 여름에 장마가 져서 금강이 넘쳐 수백호가 떠내려가 남녀 수백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공은 가산을 털어 이재 민을 구제하니 이때부터 공을 `적덕공(積德公)'이라 하게 되었다.
공은 1397년(태조 6)에 태어나서 1465년(세조 11) 11월 10일 별세하였으며 경기도 광주군의 남한산성 서문 밖에 장례지냈다.
묘역이 일제시대에 군용지로 편입되어 부득이 1974년 8월 9일 충남 공주시 의당면 태산리 문중묘역 국내로 면봉하였다.
1872년(고종 9)에 광록대부 영종정경에 추증되었다.
태조고황제 어진 (경기전 안에 봉안되어 있다.<보물 제931호>)